궁금한 세상 이야기

영조와 사도세자 '제대로 알지못했던 이야기'

JOIN US 2020. 8. 22. 21:44

 

[ 영조와 사도세자ㅣ아버지와 아들 ]

#제대로 알지못했던 이야기

 

#2020년 8월 20일 화성 용주사 화재

#정조, 사도세자 위패 모신 호성전 전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이야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8일간의 기록'

 

 

[ 용주사 호성전 화재, 2020년 8월 20일 ]

지난, 8월 20일 오전 1시 10분경,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자리한 용주사 호성전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이 화재는 용주사 호성전(45.12㎡) 전체를 태우고, 출동한 소방당국에 의해 20여분 만에 진화됐습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호성전 내부에 있던 사도세자, 정조,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비)의 위패가 소실되었습니다.

 

 

[ 화성 용주사 전경 ]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용주사는 1790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인근 화산으로 옮긴 뒤,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 화성 용주사 ]

특히, 용주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 1942호로, 내부에 봉안된 삼세여래후불탱화는 조선 중기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입니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 용주사 호성전 ]

이번 화재로 전소된 호성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다가, 1988년에 중건된 전각입니다.

 

내부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정조 등의 위패 뿐만 아니라, 신도 위패 2000여기도 모셔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호성전에 있었던 정조 위패 등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인근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용주사 호성전 화재로 전소된 광경 ]

또한, 호성전 옆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42호인 대웅보전에 불이 옮겨 붙지는 않아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용주사 호성전 화재로 전소된 광경 ]

용주사 관계자에 따르면, 호성전 화재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장마가 길어지면서 습기가 많아져,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② 용주사 천장 쪽 등과 비닐에 스파크가 떨어지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 용주사 호성전 화재후, 지주단만 남은 광경 ]

현재, 경찰과 소방당국은 정확한 피해 규모와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 영조와 사도세자ㅣ아버지와 아들 ]

#우리가 제대로 알지못했던 이야기

 

이번 화성 용주사 호성전 화재를 계기로, 예전에 보았던 영화 '사도'를 다시 한번 챙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군이였던 영조가 왜 그렇게까지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는 그렇게까지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녹색창과 다음창을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제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함께, 이제껏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영화 '사도'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사도

 

감독 : 이준익 감독

각본 :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

주연 : 송강호, 유아인

장르 : 사극, 드라마

제작사 : (주) 타이거 픽처스

배급사 : (주) 쇼박스

 

촬영 기간

2014년 7월 8일~2014년 10월 8일

 

개  봉  일 : 2015년 9월 16일

상영시간 : 125분

총관객수 : 6,247,651명

국내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사도'는 어떤 영화인가?

 

관객수 1,230만명의 '왕의 남자'의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재조명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도'의 가족사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세자 '사도'의 이야기를 조선 역사에 기록된 가장 비극적 가족사로 풀어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인과관계를 그려내고 싶어했습니다.

 

특히, 남다른 총명함으로 영조를 기쁘게 한 사도의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진심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대리청정, 그리고 두 사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양위파동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가족들의 엇갈린 이해 관계를 밀도 있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극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공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연출력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영화 '사도'를 통해 역사의 재현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사했습니다.

 


[ 영조와 사도세자ㅣ아버지와 아들 ]

#한줄 대사로 보는 영화 '사도'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이선.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됩니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시작이 됩니다.

 

 


[ 영조와 사도세자ㅣ아버지와 아들 ]

#우리가 제대로 알지못했던 이야기

 

'임오화변'은 우리 모두가 교과서에서 배워, 이미 알고있는 역사 사건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영화 '사도'에서는 그 역사 속에 제대로 담지 못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① 조선 21대 왕 '영조'

 

본명은 이금으로 숙종의 차남이며,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됩니다.

 

영조는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기간을 거쳐,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성군입니다.

 

부드럽고 민첩하면서, 다소 날카로운 성격을 지녔던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하며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갔습니다.

 

하지만,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천민 신분의 후궁 소생이라는 출신 때문에, 평생을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결구그, 1762년 임오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불쌍한 아버지입니다.

 


②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

 

본명은 이선으로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은지, 7년 만인 1735년에 태어난 사도는 두 살이 되기 전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사도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학문보다는 무술이나 그림에 심취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영조의 과도한 기대는 급격한 실망으로 바뀌게 되는데요.

 

어떻게든 종사를 이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세자의 교육에 심혈을 쏟았던 영조의 집착에 가까운 노력은 두 사람의 갈등을 초래합니다.

 

왕으로서 탕평과 완벽을 추구하는 아버지와 달리, 자유롭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의 아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으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이는 28세에 이르러,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 역사적 인물로 남게됩니다.

 


③ 어긋난 기대 '대리청정'

 

원래, 대리청정이란 임금의 허락을 받아 여러 일을 대신 수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대리청정은 왕세자 및 왕세손, 왕세제가 담당하였고, 그들을 소조라 불렀으며 당시의 국왕을 대조라 하였습니다.

 

영조는 왕의 기질과는 거리가 있는 사도세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조치로 1749년(영조 25년) 사도가 15세 되던 해, 자신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는 칭찬과 격려는커녕 호통과 폭언을 들으면서도 세자된 책임으로 대리청정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④ 어긋난 진심 '양위파동'

 

원래, 양위는 임금이 자신의 왕위를 죽기전에 후계자에게 계승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위파동'은 임금의 양위선언에 의한 일련의 정치적 변동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영조는 사도의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히며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했습니다.

 

재위 14년(1739년)

재위 16년(1740년)

재위 20년(1744년)

재위 21년(1745년)

그리고, 25년(1749년)

 

'양위파동'이 있을 당시, 사도세자의 나이는 각각 4살, 5살, 9살, 10살, 14세 때였습니다.

 

영조는 사도를 세자로 책봉하고, 이를 양위파동으로 적절하게 이용했습니다.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사도세자는 석고대죄하며 철회를 애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리청정과 양위파동을 거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사도세자의 불안 증세도 더욱 심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⑤ 돌이킬 수 없는 운명 '임오화변'

 

임오화변은 1762년 임오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8일만에 숨진 사건입니다.

 

1762년 노론의 하수인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영조에게 고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영조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고,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석고대죄합니다.

 

하지만, 결국 7월 4일, 영조는 사도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그리고, 자결 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조는 아들이 사도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려 뒤주에 가두게 합니다.

 

 


#임오화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8일간의 기록'

 

① 첫째 날

세자는 뒤주 안으로 들어가고 영조는 쇠못을 박습니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② 둘째 날

영조는 세자의 무리를 벌하고, 그를 평민으로 만드는 교지를 쓰라 명합니다.

 

"세자의 생모 영빈이 고하기를, 과인의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다며 대처분을 청하였다"

 

 

③ 셋째 날

영조는 뒤주를 깨고 도망쳐 나온 사도세자를 잡아 다시 가두고, 무덤처럼 뒤주 위에 떼를 덮어버립니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④ 넷째 날

견디기 힘든 갈증 속에 부채를 집어 든 사도는 그 안에서 자신이 그린 용 그림을 발견하고 오열합니다.

 

"이 일은 궁궐 담장을 넘을 수 없는 내 집안의 문제다"

 

 

 

⑤ 다섯째 날

사도세자는 캄캄한 뒤주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합니다.

 

"몽아, 어젯밤엔 왜 안 짖었니?"

"너도 주상이 무서우냐?"

 

 

⑥ 여섯째 날

아버지 사도와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도 드릴 수 없사옵니까?"

 

 

 

⑦ 일곱째 날

임금과 세자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로 마음의 대화를 나누는 영조와 사도세자.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⑧ 여덟째 날

아들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영조는 회한의 시호를 내립니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하라"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영조와 사도세자는 이렇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이번 화성 용주사 호성전 화재를 계기로, 다시 한번 영화 '사도'를 챙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세자 '사도'의 슬픈 가족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궁금하면 찾아보는 궁금이였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고 궁금한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